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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S/기록

[영화] 미성년 후기

*이 포스팅은 개인적인 감상이며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 4월 22일 미성년을 봤다. 아직 안 본 사람들이 있다면 어서 보라고 해주고 싶다.

김윤석이 첫 메가폰을 잡은 영화로 주인공 대원도 김윤석이 직접 연기했다. 김윤석이 모든 남자 배우들이 이 역할을 하고 싶지 않아 해 직접 했다는데 결과적으로 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김윤석이 아니면 누가 이 연기를 할 수 있었을까.

주인공 대원은 불륜남이다. 아내 영주(염정아), 딸 주리(김혜준)가 있지만 미희(김소진)와 몰래 연애를 한다. 미희는 18살에 딸 윤아(박세진)를 낳았고 홀로 오리고깃집을 운영하고 있다. 미희와 윤아는 부모의 불륜사실을 이미 알고 있고 결국 영주까지 알게 된다. 그야말로 지옥이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전체적으로 잔잔하게 흘러가지만 김윤석 특유의 코믹함이 남아있다. 눈물이 많은 나는 말그대로 울면서 웃었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불륜을 오락적이고 성적으로 다루지 않아서 좋았다. 주리와 윤아의 시선으로 영화는 흘러가고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들과 순수함도 공존한다.

대원은 정말 찌질하고 마지막까지 구질구질한 인간으로 나온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나 가정에 대한 애정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영화 내내 남자로서의 매력이라곤 전혀 느낄 수가 없는데 왜 남자 배우들이 모두 거절했는지 알 법도 하다. 어쨌든 대원은 사건의 중심에 있고 모든 일의 원흉이다. 불륜남의 찌질한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내 보이는 게 좋았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그런 게 어디 있나 불륜은 다 불륜이지. 그런 일들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고개 들고 자신의 모습을 마주했으면 좋겠다. 아, 그리고 윤아와의 추격씬은 진짜 명장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명장면.

영주가 눈물을 보이는 장면은 러브 액츄얼리의 엠마 톰슨과 알란 릭맨이 떠올랐다. 엠마 톰슨이 조니 미첼 CD를 받고 방에서 홀로 눈물을 훔치는 장면은 언제나 나의 눈물 버튼이다. 그 짧은 순간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슬픔, 허탈함, 분노, 스스로에 대한 동정까지 절절하게 느껴져서, 아이들을 위해 아닌 척 집 밖으로 나오는 순간까지 가슴이 미어지게 만든다.

영주는 강인한 여자다. 맨발로 뛰쳐나오며 주리에게 도시락을 쥐어주는 장면, 미희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주리 앞에선 의연한 척 웃으며 평소처럼 행동하는 모습에선 딸에 대한 사랑이 돋보인다. 통장과 서류들에 박혀있는 대원의 이름들은 영주의 뒷모습을 더 작고 초라해 보이게 만든다. 결국 윤아의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한순간에 엉망이 돼버린 자신과 가족을 돌봐야 하는 자기 연민처럼 느껴졌다.

홀로 오리고깃집을 찾아간 영주는 무엇을 바랐을까. 아마 남편의 불륜 상대, 미희가 흔히 말하는 여우 같은 여자이길 바라지 않았을까. 기대와 달리 미희는 싹싹하고 밝고 수수하며 자신과 다름없는 평범한 여인이었다. 그것이 영주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과연 산모 수첩을 쓰면서 미희가 상상하던 미래엔 대원이 있었을까. 어쨌거나 미희는 대원과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이를 지우길 바랬던 주리와 윤아는 아이의 엄마 노릇을 자처한다. 어떻게 태어났든 아이는 죄가 없다. 하지만 갓 태어난 아이는 둘의 사랑놀음처럼 금방 불씨가 사그라들었고 미희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었다.

주리와 윤아는 영화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다. 서로의 부모를 욕하던 둘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서로 다르면서도 닮은 두 인물을 안타까워하기엔 가장 문제를 잘 극복하고 당차게 나아간다. 두 '미성년'이 가장 어른처럼 보인다.

엉망이 된 것은 언젠가 자리를 잡을 것이고 기억 저편에 묻어둔 채로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윤아와 주리는 평생 잊지 않는 법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은 신선한 충격이었으면서 아이들이기에 가능한 발상이 아니었나 싶다. 남편을,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지만 남은 사람들은 더 소중한 것을 알고 있었으며 서로를 얻었다.

박찬욱의 아가씨가 단어의 원래 뜻을 되돌려 놓은 것처럼 미성년한테도 그런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손익분기점이 100만 명 이라는데 현재 누적 관객수가 28만이다... 그나마 있던 상영관도 어벤저스에 밀려 많이 사라졌다. 오랜만에 국내에서 이런 수작이 나왔는데 이렇게 지나가다니 너무 아쉽다. 제발 더 많은 사람들이 미성년을 봤으면 좋겠다.